* 공명(https://silverywave.tistory.com/4)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폭력 묘사 주의

눈을 뜨면, 정교한 자수처럼 별이 수놓인 밤하늘이 광대하게 펼쳐진다.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샤아의 행방부터 찾았다.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 부서진 노멀 슈트 차림으로 쓰러진 형상을 발견했다. 헬멧 오른쪽 부근의 큰 균열 사이로 피칠갑이 된 얼굴이 보인다. 느리게 몸을 일으키자 육중한 고통이 몰려왔다.
윽, ……
시야를 방해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샤아에게 다가갔다. 여즉 남은 온기가 샤아의 눈가에 닿은 손끝에 전해진다.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고자 헬멧을 벗기니 본래의 정제된 형태를 잃고 헝클어진 금색 머리칼, 피로 물든 흉터와 고요히 감긴 두 눈, 큰 상처로 덮인 볼, 찢어진 입술이 눈에 띈다.
한 손으로 맥을 짚어 보면 미약한 박동이 느껴진다. 생사를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은은한 빛의 무리가 물결치는 바다, 산산조각이 나 형체를 식별하기 어려운 콕핏 조각들, 한때는 하얀 유성을 상징하던 뉴 건담의 일부였으나 무참히 쓸모를 잃은 부품 몇 가지가 전부다. 몸을 속박하는 중력이 느껴지나, 지구의 중력과도, 콜로니의 인공 중력과도 어딘가 다르다. 이 기묘한 공간은 지구도 콜로니도 아닌 곳이다. ……질 나쁜 꿈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샤아를 대신해 공간 내부를 수색하려 몸을 일으켰다. 군데군데 붉게 물든 채 박살이 난 노멀 슈트를 보면, 그가 목숨만 겨우 건진 상태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숨이 붙은 것이 기적이다.
발 하나 떼는 동작조차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불가능하진 않다. 짓누르는 통증을 견뎌내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
부품 몇 가지와 콕핏 조각 외의 다른 물체라곤 아무것도 없다. 다친 신체의 한계로 먼 거리를 이동하진 못했으나, 어쩌면 이 공간 내부에는 부서져 흩어진 잔해들과 나와 샤아, 둘만이 남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습한다. 또 이상한 점은, 분명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체력 소모가 심한데도 허기가 없다는 것이다.
응당한 식욕도, 수면욕도 빠져 버린 듯하다. 헛웃음이 나온다. 여긴 인간 신체의 기본 법칙과 순환 원리조차 무시하는 공간인가. 이곳이 내 꿈속이 아니라면 정말 누군가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악취미는 결코 반갑지 않다. 다시 샤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그새 의식이 돌아왔는지 눈을 깜빡이고 있다. 숨이 붙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아무로……?
일어났군, 샤아.
여긴 어디지?
몰라. 수색하고 있다.
그의 지난 행적에 대해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당장 책망할 마음도 들지 않는 것은 제법 묘한 일이다. 공명하던 순간 많은 것을 보았던 탓이리라. 찬란한 모양으로 반짝이던 공명의 빛 속에서 들여다본 것은…… 분명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샤아의 이면이었다. 그것을 되새기면 문득 강렬한 빛이, 어떤 열기와도 같은 것이 무의식 깊은 지점으로부터 솟구치는 기분이 든다. 순간 역한 감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푸른 눈동자에 비친 별들이 아른거린다. 간격을 좁혀 샤아의 눈을 내내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다시 포착해 내려는 강한 본능이 몸을 이끌었다. 마주한 눈빛에 동요가 일어나려 하자, 급히 고개 돌리곤 자리를 옮겼다.
……마저 수색하고 올게.
내면에서 요동치는 열을 견딜 수 없다. 걸음을 옮기는 동작이 점점 빨라진다.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바다로 도망치듯 향했다.
***
비현실적으로 조직된 이 공간의 정체와 원리를 탐구하고, 활용할 만한 다른 무언가를 찾는 일에 한동안 몰두했다. 여전히 낮은 오지 않고, 인간의 3대 욕구도 자취를 감췄다. 넓은 바다를 옆에 두고 한참 걸음을 옮기면, 나를 찾는 샤아의 사념이 뇌리에 침입하곤 한다. 몇 번 외면하고 나서야 그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샤아는 그새 신체 손상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 공간에선 따로 처치를 하지 않아도 자연히 손상이 치유되며 그 속도도 다소 빠른 것 같다. 나 역시 그간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무로, 뭔가 알아낸 건……
아직 없어. 네 콕핏 잔해와 건담 부품은 다 조사했다. 단서가 될 만한 건 발견하지 못했어.
……영영 이곳에 갇히게 된 것일까?
그렇게 되진 않기를 바라지.
나도 수색을 도울까?
그럴 필요 없어.
생기를 잃은 눈동자에 탁한 색이 돈다. 그 눈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본능이 다시금 몸을 이끈다. 거리를 좁혀 눈을 응시하면 가만히 이쪽을 마주 보던 동공에 조금씩 파동이 나타난다. 그 작은 변화를 감지한 순간, 강렬한 빛이 정신을 관통하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자리를 떴다. 이것은 내 안에 잔존한 빛이다. 생각을 돌리고 거리를 넓혀도 진화되지 않는 열이다.
일순간 두통이 몰려온다. 천천히 다가오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바다 근방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면으로 상념을 차단하는 일조차 불가능한 세계라니…….
왜 네가 영원히 지속되는 의식은 고문이라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라라아.
***
꽤 오랜 시간 후에 샤아가 머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지점에서 보여야 할 익숙한 형체가 사라져 있다. 주변을 살피다 밀려오는 물결에 얼굴을 담근 채 쓰러진 샤아를 발견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거칠게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리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여러 번 기침하며 물을 내뱉는다. 분노가 일어 샤아가 내보인 뺨을 가격하자, 아물어 가던 볼의 상처가 터져 다시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비겁하게 죽음으로 도망칠 셈이었나?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아무로, 나는 이제 무엇이지?
넌 샤아 아즈나블이야. 내가 있는 한.
바다 표면에 얕게 깔린 빛의 무리가 샤아를 비춘다.
누구도 한참 이어진 정적을 깨지 않았다.
***
그 소동 이후로 깨질 듯한 두통이 심해졌다. 두 손까지 미세하게 진동하는 광경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스스로 단단하다 자부했던 제어력을 부수고 온 정신을 무너뜨리려 드는 빛이 원인이다. 뇌리에 깊이 잔류한 것을 회상한다.
붉은 혜성·네오지온 총수의 이면, 무겁고 화려한 가면에 가려진 본질…… 그 사이에 아무로를 부르는 사념이 끼어들자 이성이 증발하는 감각이 밀려온다. 아주 오래 전 무의식 어딘가로 밀어넣은 성질이 되살아나려 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을 응징하려는 마음과는 결이 다른, 오로지 파괴만을 향한 욕망이기에 이렇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다.
역시 그때 너무 많은 것을 봤어.
.......
답이 없는 샤아에게 뭐라도 외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넌 공명하던 빛 속에서 무엇을 봤지? 왜 너는 여태 아무런 말이 없지? 너라는 인간의 실체를, 너와 맞서던 내내 알지 못했던 근본을…… 그 무수한 것들을 본 건 나뿐인가?
고개 숙여 이를 악물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
아무로... 괜찮나?
샤아의 손이 요동하는 내 손에 닿는 순간 무언가 강렬히 번쩍인다. 그대로 샤아를 넘어뜨리며 거의 동시에 한 팔을 뻗어 세게 목을 쥐었다. 가까이에서 너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젠 자리를 뜨는 일도, 애써 내면을 잠재우는 일도 없다.
컥, ......
너를 물리적으로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다. 너도 알고 있다. 푸른 눈동자에 별이 하나 둘씩 떠오르고, 그때 보았던 광경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간다. 본능이 그토록 원해 오던 것이다. 무엇에도 가려지지 않은 순수하고 투명한 별들.
「사실 너도 알고 있었지?」
「……강력한 사념이 날 조각내고 있어. 이것은 마치… 나의 본질만을 남겨두고 모조리 해체하려는 욕망…」
「샤아, 넌 이제 내가 없으면 그 무엇도 아냐.」
너는 나를 이루던 세계를 부수고 비틀어 확장시켰다
모든 시작이 너였으니
이번에는 내가 너의 세계를 파괴하여 시작점이 되겠다
끝내 이성을 뚫은 섬광이 네게 내리꽂힌다.